제주여행

동자복

코스모스49 2011. 7. 26. 17:59

서자복을 찾아으니 동자복을 아니찾을수있겠는가.? 

건입동도 꽤나 크다 들었는대 무작정 나서본다.

저녁이면 분주할 흙돼지골목을 가로질러~

수협으로  건너오니 예는 아침마다 분주하다.

벌써~하역작업들을 모두 끝낸 배들은 정박해 있고..,

공항에 내리는 저 여객기 오늘에 첫번째 손님이 아닐런지..,

 하역작업과함께 빤짝스는 장터인가.?  흥정하는 눈치작전도 많이 배워야겠네.~

    사려는사람 파려는사람 웅성웅성~뒷전으로두고 산지천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보니 훤한 아침 산지천 발길은 오늘이 처음인것만같다.

 예서도 태우놀이를 하는가.~? 산지천 물위에 떠있는 태우

  오늘은 낚시하는분들이 보이지는 않는군.  그것도 다 때와 장소가 있느게야~

  마을길도 걸어다녀보니 볼것이 눈에 많이 띄인다.

     용진교 건너 해안쪽으로 검은돌 푯말이 하나보였다.

     도록고 제주말인게지...,

     설명서를 보니 차라는 말이 잘못되었나보다. 무동력이라면

     사람이 밀고다녔다는 이야기인대..,

     김녕에서 한림까지 석탄을 밀고다녔다는 말이아닌가.?

     이런 **놈들

 

     "아저씨 시외버스정거장이 어디로가요.?"

     여학생 둘이서 다가와 묻는다.

     "어딜가시는대.., 시외버스정거장은 예서 좀 멀구먼~"

     자세히좀 알려주려 했건만~

     "이쪽로 가는건 맞죠.?"   종종 걸어가 버렸다.

 

복원부지 안내에 적힌글을 옮겨본다.

김만덕은 1739년 김응열에 딸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교방에 의탁되면서 기적에 오르게되었다.

그러나 본시 양가에 딸이었으므로 23세때 부당하게 기적에 오르게된 사유를 들어 관에 호소하여 기적에서 삭제되엇다.

양녀로 돌아온 그는 독신으로 농,축산과 장사를 하여 크게 부자가 되었다.

1794년 큰 흉년이들때 굼주리는 동포를 생각하여 거금을 연출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여 이들을 구흘하였다.

당시 유사모목사가 이사실을 정조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소원을 물으니 궁궐을 우러러 보는것과 금강산을 구경하는것임을 아뢰었으므로 임금께서 쾌히 허락하고 국비로 소원을 이루게 하였으며 특히 내의원 의녀반수의 벼슬을 내려 임금을 알현하게 하였다.

1812년 74세로 돌아가시니 제주성내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ㄱ,으리 ㅁ,루 병원지에 안장하였는대 1

977년 시가지 확장으로 사라봉 모충사에 안장하여 만덕의 근검,절약,박애정신을 길이 받들고있다.  라 기록되어있다.

 

객주터를 뒤로 만덕로에 오르니 만덕로 중간쯤에 왼편으로 바로 동자복을 만났다.

이리도 쉽게 찾을줄이야~

     두손을 모아 예를 갖추고난후 한장 찰칵~

 

여기에 또 안내판 글자를 옮겨본다.

             동자복

         제주특졀자치도 민속자료 1-1

                소재지 제주시 건입동

 

건입동 복신미륵은 제주성 동쪽에있는

자복이라하여 동자복이라 불렀다.

현존라는 동자복은 입상으로 신장이

286m 얼굴이 161m이다.눈위에는

눈썹을 앞가슴에는 맞잡은 팔의

소맷자락을 표현했다. 이 동자복이

서있는 곳은 미륵밧(미륵밭)이라

불렀다.

 

제주도의 복신미륵은 조선시대에

만수사라는 절에있던 동자복과 해륜사

라는 절에있던 서자복등 두기가 있다.

이 두기에 복신미륵은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는대 이것은 2기씩 쌍으로

만들었던 고려시대석불 입상에 특징을

보여주는것이다.

 

복신미륵은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미륵보살을 뜻하는 말로 문헌과

사람에 따라서 자복,자복신,자복미륵

미륵불,큰어른,미륵보살등으로

불리어졌다.

 

      어린시절 우리집 장독대에도

     여름이면 늘 저렇듯 고추화분이

     널려있었지...,

  동네길도 알겸 나온김에 사라봉까지 다녀올양으로 골목을 눈대중으로 돌고 돌다보니...,

사라봉 약수터쪽으로 오른다는것이 이게 웬일 제주여상 정문길로 나오고말았네~

후덥지근한 날씨는 등줄기에 땀

 

  건입동이 크긴 크구나...,

 

 

사라봉쪽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꽃댕강을 흔들어 깨우니..,온통 동네가 꽃향기에 가득하다.

 

 약수물 한주박 시원스리 들이키곤 곧바로 오른다.  사라봉 계단길..,

  다람쥐집은 저렇게 생기지는 않았겠지.?

사라봉에 오르니..,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내 마음은 어느새 어렸던 시절 두눈가리고 전봇대에 서있네....

  역시 무궁화꽃은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있고 기풍이 가득하다. 꽃중에꽃 무궁화꽃~♪

 

 

 

 

여기있는 운동기구들은 사람 손때들이 묻어 반질잔질하네~^^*

계속 마른 천둥을 쳐대드니 한라산 높은곳에는 소나기라도 내리는가보다.

부지런히 돌아가야 됄라나보다.

  올커니~ 늘 궁굼하던걸 알고가야지 빨리 돌아갈생각에 사라봉 등대가 떠올랐다. 등대쪽으로 하산

 

 

 

 

맑은날이면 멀리 보이는 섬들이 도대체 무슨섬인지 궁굼했는대.,

어느 지인께서 등대에가면 알수있다던 말이 생각이..,

   에구~ 빈몸  걷기도  힘들건만..., 역시 젊다는것은 좋은것이여~~~~~~ㅋㅋ

 

너희들도 무척이나 덥겠구나~ 그리 경계할 사람은 아니니라...,

내 너희들을 만나려고 잠시~올레길을 잃었던가보다.~

 

 

 

   올레길 걷듯 걸어다니다보니 참으로 볼것도 많다.  

 

     

     옛 주정공장 터 비문

이곳은 제주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4.3사건당시 수많은 제주민중들이

끌려와 감금당한채 온갖 고초를 겪거야했던 모진 세월이 고스란히 베어

있는 옛 주정공장 터이다. 4.3의 와중에 목숨부지를 위해 한라산 일대에

피난했던 주민들은 혹한의 겨울을 야산에서 견디다가 귀순하면 살려준다

는 군경 토벌떼의 선두작전에 따라 대부분 순순히 귀순하였다.

하지만 용공혐의를 뒤집어 씌워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었을뿐만이 아니라

영문도 모른채 산지항을 통해 육지형무소로 끌려가야했다. 또 한국전쟁

발발후 예비 검속자들 역시 집단 수용되었다가 행방을 모르는등

헤아리기조차 힘든 수천에 우리 부모형제들이 마지막 생존을 향한

몸부림이 남아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태평양과 맞다아있는 저 앞바다를 보라. 예나 지금이나 일렁이는 파도는

변함없이 제주해협을 오고가지만 반세기를 훌쩍 넘긴 오늘날까지

어떤 기별도 한줌 흔적도 추스리지못한 슬픔을 가눌길 없는 우리 유족들은

다시는 이땅에 4.3과같은 참혹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이 빗돌을 세운다.

                                       서기 2005년 4월1일

                                  제주도 4.3사건 희생자 유족회 근림